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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의 명상록2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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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댓글 0건 조회 6,020회 작성일 14-02-19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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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의 명상록2 (영문)
옮긴이 윤경남

1945년 10월 20일, 윤치호

1. 친일파로 비난을 받고 배척을 당한 사람들 중에 능력있고 쓸모있는 사람들 이 많이 있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자기만이 옳다고 우겨대는 비방자들은 누구일까요? 비방하는 그 친구들 가운데 대부분이 1945년 8월 15일 정오까지만 해도 동쪽을 향해 절하고, 일본신민 맹세를 되뇌이며, 모든 학교에서, 교회에서, 공장에서, 정부와 큰 사업가 사무실에서, 백화점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장 등의 공공장소라면 어디서나 덴노(천황)를 위해서 반자이(만세)를 외쳐댔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개명을 했습니다.
어째서 그 조선백성들은 모두 친일파와 똑 같은 행동을 했을까요? 그들은 단지 친일을 하지않을 수 없었고, 아니면 감옥에 가야만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에게 먼저 돌을 던지려고 하는 것 일까요? 두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미스런 자신의 과거를 감추기위해 사람들의 눈 속에 먼지를 털어넣는 것입니다.

둘째는, 정당이나 개인의 주머니를 채우려고 일부러 공포와 근심에 쌓인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에게 친일파라는 치욕을 주려는 참으로 터무니없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일제 치하의 34년 동안 조선의 위상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조선이 독립적인 왕국이었나요? 아니지요. 우리는 단지 일본의 일부였기 때문에, 미국이나 다른 세계 열강들도 그렇게 인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사람은 좋건 싫건 일본인 이었습니다. 일본의 신민으로서, ‘조선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들에게 일본정권의 명령과 요구에 응하는 것 말고 어떤 대안이 가능했을까요? 우리의 아들들이 전쟁터로, 딸들은 공장으로 징집되었을 때, 군국주의자들의 명령을 거절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일본의 신민으로서 한 일을 가지고 비난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않는 일입니다.
추방된 조선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다방면에 걸쳐서 앞서 간 선배들로부터 다양한 효율성과 규율을 배웠습니다. 각 지역의 상황과 조선인 대중의 요구에 대한 그들의 지식과 재능은 조선의 새 정부 지도자들에게 크게 유용하리라 생각합니다 .

2. 그런데, 마치 그들이 자신의 힘과 용맹성으로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조선을 구해내기라도 한 것처럼 어딜가나 인위적인 허세를 부리고 다니는 자칭 구세주들의 꼴이란 참으로 가관입니다. 그자들은 아둔하거나 수치심이 없는, 아니 그 둘 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조선의 자유가 달나라 속에 살고 있는 사람만큼도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이른바 그 ‘해방’이란 우리에게 단지 동맹으로 맺어진 연합군의 승리의 한 부분으로 우리에게 온 것 뿐입니다. 만일 일본이 항복하지 않았더라면, 저 허세와 자만에 찬 자칭 '애국자'들은 어떤 사람이 큰 지팡이로 일본을 내쫓을 때까지 계속해서 동방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선서를 읊었을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이 허세와 자만에 찬 저 '애국자'들이 일본을 몰아낸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만일에 어떤 이변이 일어나서 일본이 조선을또 다시 그들의 손아귀에 넣는다면, 그 허세부리는 ‘애국지사’들이 일본을 몰아낼까요?
이 허풍장이들은 우화에 나오는 어리석은 파리처럼 이야기하고 다닐겁니다. 달리는 마차 위에 내려앉은 파리 한 마리가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 마차는 내 힘으로 바퀴가 굴러가고 있다, 라고요.
우리는 ‘해방과 자유라는 선물’을 준 그 행운의 별들을 솔직하게 시인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겸손하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잃었던 보석을 되찾은 ‘은총의 선물’을 받았음으로, 다시는 그것을 잃지 않게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소한 개인적 야심과 당파적인 음모와 지역간의 증오심일랑 모두 묻어두고, 고통을 받고 있는 우리나라의 공익을 위해 다 함께 협력하여 이 조국을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지정학적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민중들의 무지와 당파 간의 불화속에서는 우리 조선의 미래를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분열되지 말고 힘을 합쳐 나가야 합니다.

옮긴이 윤 경 남 후기 1:
1986년 초여름에 Dorothy W. Trebilcock교수가 백세 된 이모부 J. Earnest Fisher 박사를 모시고 한국을 방문했다. Fisher 박사는 윤치호의 동갑내기 절친한 친구인 Dr. Hardie의 사위이다. (하디는 윤치호의 둘째 딸 헬렌의 양아버지이기도 함)
트레빌콕 교수와 미시건대학에서 함께 재직했던 윤창구 박사가 그들을 내게 인사시켜줄 때, Fisher 박사는 윤치호 선생님이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감옥에 수감 중 하디 박사 부인에게 보낸 편지 원본과‘한 노인의 명상록2’ 복사본을 내게 건네주었다.
‘대구감옥에서 보낸 편지’(1913.11.10.) 는 <윤치호서한집> 제1부에 번역해서 올렸다. 제2부에 넣은 ‘한 노인의 명상록2’는, 1945년 해방 직후 혼란기에 시국을 걱정하면서 이승만 박사에게 보낸 편지였으며, 그 편지를 친필 복사해서 General Hodge와 친구인Dr. Hardie에게 보낸 사본임을 그 때야 알게되었다. 하디 박사의 사위인 Fisher박사가 그 편지와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가 100세 기념으로 한국 방문시에 내게 건네준 것이다.

위의 사진은 이분들이 서울 안동교회와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댁을 방문하여 환담을 나눈 사진이다.(사진제공;유경재목사860608yun.jpg) 사진설명;앞줄에서 우회전-Dr. Fisher-former President Yun, Po-sun-이상규장로-최영일목사-유경재목사님부부-공덕귀여사- Yunice윤경남-Dorothy Trebilcock교수 -일본교회平田久 (Hirata) 목사 부부-박희욱장로, 1986년 6월 8일.

옮긴이 후기 2:
풍운아와 같은 삶을 살아간 윤치호 선생의 <한 노인의 명상록2>를 읽으면서 그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하는 민족주의와 애국주의의 면모는 어디로 가고, 친일파라는 낙인만을 찍고 말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민석홍 씨가 쓴 논문 <윤치호는 왜 친러파도 친미파도 친일파도 아니었나?> 가운데서 몇가지 중요한 대목을 발췌 해본다.

“파란만장한 그의 생애를 단순히 몇가지 사건만 가지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한일의정서에 서명한일과 학도병 지원 연설한 것이 사실일지라도 평생을 조국을 지키며 노력한 선각자의 업적에 비하면 미미한 과오에 불과하다.
근검절약 하며 청렴한 윤치호는.나라가 기울어 가는 암울한 시기임에도 자행되는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와 왕실의 무절제한 낭비에 비분강개 하며 때로는 임금에게 직언함을 주저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고학하면서 절약한 돈으로 남감리교의 한국선교 기금을 마련한 일과, 공직에 있으면서 재물을 탐하지 않았을 뿐더러 일정시대를 겪으면서 어떤 형태의 이권사업에 간여하거나 재산을 늘리기보다는 오로지 선대로 물려받은 재산을 교육과 자선사업에 아낌없이 내놓았다.
따라서, 온갖 외부적인 격동과 내면의 사상을 소상하게 적어놓은 그의 일기를 통해 그의 功過를 공정하게 평가하고, <윤치호는 친일파도 친미파도 친러파도 아니고, 오로지 국민계몽과 자유평등을 추구하면서 식민치하에서도 교육과 자선사업을 실천한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선각자였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제대로 알게 하는 것이 <윤치호일기> 번역의 주제이며 목적이 되어야 한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윤웅열과 윤치호 부자가 처벌을 받게 될 고비에서 고종의 특별한 배려로 해외 유학을 갈수 있었고, 상해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으나 그에게는 축복인 반면에 정치적으로는 정적이 많아져 경계 대상이 되었다.
갑오경장으로 윤치호 父子는 사면을 받고 연립내각을 구성할때 10년만에 귀국하여 외부 협판이 되었으며, 민영환 특사와 함께 러시아황제 대관식 사절단원으로 다녀온다. 그 후에 독립협회 건으로 조정의 박해를 받으며 여러해 동안 귀양살이 같은 지방관리로 좌천을 당한다.
일본의 내정간섭이 심해지던 1904년에 지방으로 내쫓겼던 그가 다시 외부 협판에 재임명되어 제1차 한일의정서를 협상할 때의 이야기가 윤치호일기에 기록된다.
협상의 절박한 순간에 이하영 외부 대신이 꾀병을 부리며 간교하게 서명을 회피하고, 협판이던 윤치호에게 떠넘겨 외부 대신 서리로 의정서에 서명하는 곤욕을 치르게 된다.
하야시 일본공사가 강요하는 핵심은 조선정부가 외국과 계약을 맺을 때는 반드시 ‘일본 감독관’의 사전승인을 받으라는 세번째 조항이다. 윤치호는 그 대안으로 “ ‘조선정부와 외국정부 또는 외국인 사이에는 외교부가 모르는 어떠한 조약도 체결할수 없다’로 수정하자”고 제안 한다. 즉 ‘일본감독관’ 이란 낱말을 ‘조선정부의 외교부’란 말로 바꾸자는 것이다. 이에 더하여 “외부대신이 단독으로서명할수 없으며 내각의 심의가결을 받아야 의정서에 서명할수 있다”고, 반박한다. (일기 제6 권 1904년 8월21일, 윤경남 옮김)

그러나 그 다음날, 심상훈 참정 대신은 어이없게도
“ ‘일본감독관’을 ‘일본정부대리인(Representative of the Japanese Government)으로 문구를 바꾸면 동의 하겠다”고 말해 버린다. 하야시는 얼른 의정서 세번째 조항 제안에 동의를 받아낸다. “심상훈은 하야시에게 내각 결의서와 의정서에 서명하도록 내일 오후 4시에 나, 윤치호를 보내겠다고 했다.(일기 제6권1904년 8월22일,윤경남 옮김)”

“8월23일, 오후 2시에 내각이 소집 되다. 심상훈 참정대신은 내가 ‘동의’하도록 권했고, 의정서에 서명해서 일본 공사관에 보냈다. 내각 앞에 그 의정서 서류를 펼쳐 보여줄 일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조정이 의정서 내용을 심사숙고한 후에 동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의정서는 완결되었다. 의정서에 동의하는 서명을 해서 일본 공사관에 넘겼다.(일기 제6권1904년8월23일, 윤경남 옮김)”

그 당시 조정 대신들은 윤치호를 희생양으로 삼은것이다. 이 사건으로 그를 친일파라고 매도하는 빌미가되었으나, 내면의 실상을 정확하게 조명해야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할수 있다.

그 이듬해 을사조약 당일 새벽에는 인괘를 강탈 당하는 긴박했던 정황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일기 제6권1905.11월18일, 윤경남 옮김) 을사조약 직후에는 일본정부의 사주를 받은 미국인 스티븐스 고문관이 그를 친일진영으로 끌어드리려고 외부대신 서리직을 받도록 집요하게 강권하는 편지에 윤치호는 다음과 같이 단호한 내용의 회신을 보낸다.

“스티븐스씨,--외부대신 서리 임무를 맡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원래의 외부대신 직과 협판 직에 부여했던 임무가 더 이상 수행할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2. 나 자신이 굴욕감을 이길 수 없으며, 우리 동포들에게도 미움을 받는 일입니다.
전에 말씀 드린 대로, 조선사람이라면 아무도 이 조약에 서명 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 조약이 불가피한 것이라면, 일본은 그 노예 문서 같은 계약서에 도장 찍는 조선사람이 아니고는 성과를 거둘 수도 없고 거두지도 못할 것입니다.
3. 왜냐하면, 모멸감에 찬 내 동포들 앞에 나를 드러낼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사람이라면 황제의 말씀을 제쳐 놓고 일본이 약속 하는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일본이 자칭 보호국으로서 조선사람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고 관대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것을 다른 누구보다도 믿지 않습니다. 부정부패가 온나라를 뒤덮고 있습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개개인이 자신의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전쟁을 벌이고, 조선은 파멸에 이르고, 따라서 이들은 완전히 권력의 수중에 들게 될 겁니다.
우리의 구원자 이며 보호자인 일본은 틀림없이 현명한 자의 눈을 멀게 하는 그럴듯한 규정을 제정할 것이 틀림 없을테니까요! 이러한 무리 속에서 내가 무엇을 선택할것이라고 기대 합니까?...중략…
‘나는 우리 황제께서 통치 기반을 깨끗이 마련해놓고 진정한 개혁을 하시지 않는 한, 어떤 직책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말씀을 드리는바입니다.” (일기 제6권 1905. 11월 29일, 윤경남 옮김,
*스티븐스는 1908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장인환 의사의 총에 암살당한다)

조정대신들은 젊은 엘리트 윤치호를 각기 자기 진영에 끌어들여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으나 입신양명이 보장된 그 출세의 길을 윤치호는 모두 거절한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40년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어떤 관직도 맡지 않았고 오로지 교육, 선교, 청년운동과 자선사업에 만 몰두 하였다.

특히 이노우에 일본공사와 웨베르 러시아공사의 끈질긴 회유를 받는 한편 미국선교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교류하면서도 오로지 나라의 자주와 굳건한 독립만을 추구했다. 본인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국제결혼, 지방색 파벌 타파, 그리스도인으로서 개혁과 신교육 실천을 위해 YMCA운동과 한영서원-송도학교 운영, 독립협회 주도, 독립신문 발간 등에 앞장 선 자유평등사상가에게 개혁을 두려워하는 기득권 수구 세력들은 그를 이방인 취급하고 경계하였다.
개혁이념이 맞는 동지가 몇사람만 더 있었더라도 조선의 역사가 좀더 일찍 개명했으리라.

그를 아끼고 개혁을 기대하며 후원한 이는 오로지 아버지 윤웅렬과 고종황제와 민비, 그리고 외국선교사 몇사람 뿐이었다.
그가 친러파도 친미파도 아니고 더구나 친일파는 될 수없는 인물임을 그의 일기를 통해 알 수있으며, 가식이 없고 솔직하며 아름다운 문체로 세계문학사에 오를만한 일기를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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