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이순신'이 깎아내린 윤두수(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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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원, 문집 ’오음유고’ 국역
율곡(栗谷) 이이(李珥.1536-1584)가 죽자 그와 정치 향배를 같이 한 오음(梧陰) 윤두수(尹斗壽)는 그를 위해 제문을 지었다. 그 제문 중 한 대목은 이렇다.
“석담(石潭)은 안개에 가리고 율곡(栗谷)은 구름에 잠겼네. 도서(圖書)는 황량히 끊어지고 산수만 높고 깊을 따름이네. 공적이건 사적이건 애통한 마음, 하늘을 보니 망망하기만 하고, 삼가 상여 앞에서 곡하니 눈물만 줄줄 흐르네.”
석담과 율곡은 이이가 생전에 사용한 호. 돌 연못(石潭)과 밤나무골(栗谷)이 그 주인(이이)을 잃어버리고 황량하게 된 풍경에 비겨 이이의 서거를 안타까워했다.
윤두수는 나아가 송강(松江) 정철(鄭澈.1536-1593)과도 같은 배를 탔다. 타협을 몰랐던 송강이 실각하자 윤두수 또한 그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어 유배된 일도 있다.
윤두수는 생몰 연대(1533-1601)에서 보듯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라는 격랑의 시대 그 한복판을 살았다. 유배 중에 임란이 일어나자 어영대장으로 재기용되어 몽진에 나선 선조를 호종(扈從)했으며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까지 올라 망국 일보직전에 몰린 왕조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진력하기도 했다.
나아가 윤두수는 당대 문단의 거두로 꼽힌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1537-1616)의 형이었다.
그럼에도 윤두수-근수 형제는 최근 이미지가 급전직하했다. 최근 종영한 KBS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주인공 이순신과 그의 후견인인 서애 류성룡을 의인이자 충신으로 만들어내기 위해 그 반대편에 윤두수-근수 형제를 내세웠다. 이런 구도에 의해 두 형제는 시종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간신과 같은 인물로 그려졌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나라를 치려 하니 조선에 길을 내달라고 보낸 협박 편지 내용을 그대로 명에 알려야 나중에 쓸데 없는 오해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 유일한 인물이 윤두수이며, 애초 함흥을 향하려던 어가를 의주 쪽으로 돌려세운 주인공도 윤두수이고, 압록강을 넘어 중국으로 도망치려는 선조를 설득한 주인공도 그였다고 선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드라마가 ’악인’으로 몰아낸 윤두수가 돌아왔다. 그의 문집 오음유고(梧陰遺稿)가 국역되어 나왔다. 한국고전번역원이 기획하는 고전국역 시리즈 중 하나에 그의 시문 유고집이 포함되어 최근 선보인 것이다.
발행처는 번역원이 아니라 그 전신인 민족문화추진회로 되어 있다. 지난해 예산으로 집행된 사업 결과물이기에 이전 간판을 달고 나왔다. 역주는 소장 한문학자 권경열(40)씨가 맡았다.
국역 저본은 윤근수가 사망하고 30년 가량 지나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그의 장남 해창군(海昌君) 윤방(尹昉.1563-1640)이 목활자를 이용해 간행한 초간본(규장각 소장). 이후 오음유고는 윤두수 사후 128년 뒤인 1729년(영조5)에 윤두수 5대손 윤유(尹游.1674-1737)가 새로 목판으로 찍은 중간본(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이 있다.
전 3권인 초간본에는 계곡(谿谷) 장유(張維.1587-1638)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이 쓴 서문이 있고 아들 윤방이 문집 발간 경위를 적은 발문이 따로 있다.
발문에서 윤방은 “선군자(先君子.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육경(六經)을 배워 이를 경륜과 사업에 펼치셨으니 시문 같은 것은 다만 여사(餘事.소일거리)로 여길 뿐이셨다”고 하면서도 “평소에 지으신 시문이 쌓여 권질(卷帙)이 되었으나 임진년 병화를 거치면서 모두 소실되었다”고 했다.
이로 보아 윤두수는 시문에 주력한 동생 윤근수와는 달리 글쓰기를 즐긴 성향은 아니었으며, 그나마 남긴 글 또한 병화 속에 상당 부분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집 오음유고가 다른 조선시대 문집에 비해 분량이 매우 적은 까닭이 이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연합뉴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200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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