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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향 교수 특별기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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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yunice
댓글 0건 조회 3,135회 작성일 15-09-16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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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26일, 해위윤보선 대통령 추모예배에 강연한 박지향 교수님의 <윤치호 선생님>에 대한 강의와 관련있는
박교수님의 논문 <꽃과 칼을 동시에 사랑하는 민족:일본비평3호>를 그날 참석못한 윤문을 위해 올립니다-



<꽃과 칼을 동시에 사랑하는 민족>
박 지 향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

좌옹 윤치호(1865~1945)는 1865년 1월 26일, 충남 아산군에서 윤웅렬의 장남
으로 출생하였다. 윤웅렬은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다녀와 별기군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으며 후에 군부대신을 역임한 인물이
다. 윤치호는 1881년 정월에 신사유람단 어윤중의 수행원으로 도일하였다가 그
곳에 남아 일본어와 영어를 배우던 중 초대 미국공사 푸트 (LuciusFoote) 의 통역관으로 귀국하여(1883년 5월)궁궐에 드나들었다.
김옥균과 가까웠던 관계로 인해 갑신정변 후 국내에 있을 수 없게 된 윤치호는 중국 상하이로 가 5년 가까이 공부하였다. 1888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그해 11월부터 1893년 10월까지 밴더빌트 대학과 에모리 대학에서 공부한 후 1893년 11월부터 약 1년간 상하이 중서서원에서 가르치다가 1895년 초에 귀국하였다.
윤치호는 1897년부터 독립협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제2대 회장을 지내고 서재필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에는 독립신문을 맡아 발간하였으며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다. 그는 독립협회운동이 실패한 뒤 지방관으로 좌천되었다가 외무협판에 임명되었지만(1904)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일체의 공직에서 물러났다.
1906년에는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여 이끌었으며 1908년에는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하고 교육에 힘썼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음모로 알려진 105인 사건으로 3년여간 수형생활을 한 후 1915년 2월에 출옥한 후 윤치호는 어떤 민족운동 단체에도 참여하지 않고 동시에 일본당국이 제시하는 어떤 직책도 받아들이지 않은 채
YMCA연합회 위원장을 맡아 명실공히 조선 기독교계의 최고 지도자로 활동하면서 교육계몽 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을 전후해서 중추원 고문, 흥아보국단 위원장, 일본기독교청년동맹 조선연합회 회장,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상무이사 등을 맡았으며 해방 직전에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외견상으로 보면 윤치호는 일제 말기에 이르면 변명의 여지없는 친
일파의 삶을 살았다. 1)
그러나 그가 일본에 대하여 가졌던 정서는 흠모와 증오가 교차하는 복잡한 것이었다. 이 글에서는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일기를 토대로 그의 대일관을 정리해 본다. 2)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윤치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젊은 시절부터 말기까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친일에 나섰던 일제 말기에 이르러 윤치호가 일본에 대하여 더욱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이 사실은 그의 친일행위의 동기 규명을 어렵게 만든다. 아래에서는 우선 윤치호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일본
인의 성정과 식민정책에 대한 그의 평가를 분석한 후, 태평양전쟁 시기 그의 협력
행위의 근거를 추적함으로써 윤치호의 대일관을 살펴보기로 한다.

1. 윤치호의 사상
윤치호는 일본, 중국, 미국에서 10년이 넘는 유학생활과 교사생활을 한, 당시로는
보기 드문 국제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
추고 있었다. 서양인들조차 윤치호의 언어능력에 혀를 내둘렀는데, 예를 들어 세
브란스의전 제1회 졸업식(1908)에서 윤치호는 조선어와 영어로 각각 연설을 한
후 중국인 건축가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통감의 연설을 통역함으로써 사람
들을 놀라게 하였다.3)
그의 일기도 윤치호가 젊은 시절 습득한 영어를 평생 잊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가 1887년 상하이에서 미국 남감리교도로 세례를 받았다
는 사실도 윤치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 후 미국 유학생활을 통해
윤치호는 유교적 틀에서 벗어나 자유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유가 인간
의 가장 중요한 본성임을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란 악과 싸워서 쟁취하는 것
이라고 생각하였다.
윤치호는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부커 티 워싱턴
(BookerT. Washington)의 말, 즉 “자유는 선물이 아니라 정복”이라는 말을 좋아하여 몇
번이나 언급하였다. 그 외 자유주의의 가치인 근면, 자립, 정직도 윤치호에게 대단
히 중요하였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조선 사람들이 근면의 미덕을 배우지 못했다
고 판단하였다. 언젠가 선교사인 스코필드(F. W. Schofield)박사가 “하나님은 조
선 사람에게 나라와 긴 손톱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도록 주셨는데 조선 사람은 긴
손톱을 택하고 나라를 버렸다”고 한 말을 두고 윤치호는 조선 사람들이 게으름
때문에 나라를 잃었다는 말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라고 감탄하였다.4)
그는 또한 중용을 중시하였는데 유길준에게 “나는 어느 당파에도 속할 수 없습니다. 문
제의 양면을 너무 많이 보니까요”라고 토로하였다.5)
그러기에 윤치호는 매사에 양비론적 판단을 하였고 그것이 아마 일제에 협력하게 된 하나의 설명이기도 할 것이다. 즉 일본의 정책을 비판했지만 동시에 조선인들의 잘못을 객관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모든 것을 일본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윤치호는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이 가능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자유를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비록 조선이 일본제국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독립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희구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믿
었다. 독립의 기회가 올 때까지 조선 사람들이 할 일은 배우고 또 배워서 역량을
닦는 일인데, 그것은 독립이란 획득 못지않게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윤치호
는 또한 역사발전에서 과격한 단절이 아니라 점진적 개선을 믿었고 국가와 시민
의 관계에서는 로크 식의 사회계약론을 견지하였다.
무엇보다도 윤치호를 다른 조선인들로부터 구분해 주는 특징은 그의 남다른 국가 개념이었다. 근대 서양문 명에 정통했던 윤치호는 이상적 근대국가가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설정하였고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를 국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가 상정한 국가는 부유하고 강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시민 모두가 ‘공덕심’을 가지고 있고 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성숙한 국가를 의미하였다. 다른 조선인들에게 독립 국가라는 외형이 중요했다면 윤치호에게는 국가의 내용이 더욱 중요하였던 것이다.
그가 받아들인 또 다른 원칙은 사회적 다윈주의였다. 윤치호는 역사상 어떤
인종이나 민족도 전쟁을 통하지 않고는 진보하지 못했으며, 옳은 방향에서의 투
쟁정신은 고귀한 것이며, 죄에 대항한 강력한 투쟁이 없이는 성스러움은 불가능
하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인종 간에 우열의 차이가 있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종
속시키고 문명 수준이 앞선 나라가 뒤진 나라를 가르치고 훈련시켜 인류 전체가
궁극적으로 향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었다. 따라서 강한 인종이 약한 인
종을 가르치면서 범한 어리석은 행위와 범죄는 “그와 같은 큰일”을 하는 데 피할
수 없는 “필요악”이 되는 것이다.6)
윤치호는 그러나 인종적 계서제에 대한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그는 환경이 바뀌면 열등한 종도 얼마든지 우월한 종이 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러기에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을 때 환호하였다. 백인종이 오랫동안 상황의 주인이었는데 일본이 “혼자 힘으로 그 주술을 깨뜨려 버린 것은 위대한 업적”이라고 찬탄했던 것이다.7)
마찬가지로 태평양전쟁 시기 윤치호가 일본의 군사적 승리에 환호한 것도 서열
이 바뀌는 것에 대한 환희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는 백인종과 황인종의 서열이
바뀔 수 있음을 확인하였고 조선민족도 그럴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많은 면에서 조선은 아직 근대국가를 확립하고 유지하기에 미비한
상태라는 것이 윤치호의 판단이었다. 그에 의하면 근대국가의 시민이 갖추어야
할 첫째 조건은 자신을 죽이고 분파적 이익을 희생하며 전체를 생각하는 정신 즉
공덕심(public morality)인데, 조선 사람들은 상하를 막론하고 전적으로 공덕심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조선 사람들의 두번째 문제점은 공통된 대의를 위
해 결코 통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그것은 조선이 아직 독립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가장 적나라한 증거였다. 윤치호의 일기에는 작게는 기독교 내, 크게는 민
족운동 내에서 기호파와 서북파의 대립에 대하여 자주, 그리고 심각하게 우려하
는 기록이 많다. 그는 분파싸움에서 떨어져 있으려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호
파로 분류되고 있었는데 당시 기호파 내에는 안창호의 언행에 대한 많은 소문이
돌고 있었다. 즉 안창호가 “기호파를 먼저 없애고 그 다음에 독립하자”라고 말했
다든지, “서북사람들에게 일본 사람들은 최근의 적이지만 기호사람들은 500년
동안의 적”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을 인용하면서 윤치호는 “거의 믿을 수 없다”고
토로하였다.8)
독립의 능력을 갖추기 위하여 고쳐야 할 조선 사람들의 세번째 결점은 작은 것을 멸시하고 자신의 수단과 능력을 넘어서 일을 벌이는 매우 어리석고 잘못된 버릇이었다. 윤치호는 곳곳에서 허명을 좋아하는 조선 사람들의 버릇을 발견한다. 예를 들어 과수원을 시작할 때 한 그루도 어떻게 키우는지 모르면서 수천 그루를 한꺼번에 심는다든지,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면서 1천만 엔이라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모금을 간단히 결정하는 일 등이 그것이다.9)
네번째 조선 사람들의 결점은 자립심의 부족인데, 윤치호는 그것을 친족제도와 유교 도덕에 의하여 조장된 기생주의로 해석하였다. 덕분에 남에게 얹혀사는 습관과 기생충적
기질이 조선 사람들에게 비정상적으로 발달하였다는 것이다.10)
그러하기에 윤치호는 조선 사람들이 근대국가를 유지할 수준에 이를 때까지는 일본제국의 보호 하에 남아 있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일본이 조선에게 자치를 줄 것이라는 점을 의심하고, 또 조선이 그것을 얻
는다 해도 잘 해 낼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나 연장을
요구하기에는 나는 너무 겁이 많다. 내가 그것을 몰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누군
가가 내게 비행기나 잠수함을 준다면 그것을 받을 것인가?1)

윤치호는 무엇보다도 3・1운동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친일파’라는 악명
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우선 조선 사람들이 독립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단지
선동에 따라 독립을 외친다는 판단과, 국제정세로 봐서 아직 때가 아니라는 판단
에 근거하였다. 그는 일본의 잔인한 진압을 비난하고 젊은이들의 “눈을 뜨고 지옥
으로 뛰어드는 용기”에 눈물을 흘렸지만, 동시에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책
임한 선동가”들에게 분노를 느꼈다. 운동을 기획한 사람들은 3개월 후에는 조선
이 독립을 얻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는 그런 “어리석은 선동”이 군사적 통
치를 늘일 뿐이며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조선 사람을 더욱 가혹하게 다루는 구
실을 줄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만세를 외치는 거지들”은 결코 조선에 독립을 가
져다주지 못하는데, 외치는 것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아무리 정당해도 일
본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힘이 없는 한 그러한 선동은 조선 사람들에게 해
를 끼칠 뿐이라는 것이다.12)따라서 해결책은 오직 하나, 실력을 양성하는 일이다.
‘배우고 또 배워라’가 윤치호의 좌우명이었다. 윤치호에 의하면 조선 사람들이 할
일은 일제가 제공하는 이기(利器)를 최대한 이용하고 그들의 효율성과 기율을 배
워 근대국가를 유지할 준비를 갖추면서 국제정치가 가져다 줄 독립의 기회를 기
다리는 것이었다.

2. 일본의 문명화
윤치호는 1881년 처음 일본 땅을 밟았고 그 후에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할 기회
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일본의 근대문명 수용에 감탄하였다. 그는 사람들의 정중
함, 정결함, 친절함, 여성들의 아름다움, 깨끗한 거리 등을 열거하면서 일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나라” 가운데 하나로 간주하였다. 자연과 인간이 일본을 동
아시아의 “요정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경쟁하였다는 것이다.13)
젊은 시절 윤치호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 다음으로 일본화하는 것이 조선에게 가장 큰 축복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러한 감탄은 1905년에도 변하지 않아, 만약 자신
이 살 곳을 선택할 수 있다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 일본을 택할 것이라고 토로하였
다.14)
노년기에 이르러서도 윤치호는 “보면 볼수록 위대한 일본 사람들에게 존경
심이 우러난다”며 감탄하였다. 그는 일본인들의 “에너지와 효율성!”에 감탄하였
고, 조선이 능력과 효율성에서 일본을 따라가려면 한두 세기가 걸릴 것이라고 판
단하였다.15)
일본인들은 자기 나라를 “아름다운 강대국”으로 만들고 나서 조선에
그들의 에너지와 효율성을 도입하여 한반도를 철도와 자동차 길로 뒤덮고 항구
를 건설하고 농업과 공업을 개선하고 교육과 일본문화를 확산시켰다. 그것만으
로는 성이 차지 않아 그들은 조선보다 7~8배나 큰 만주를 “하룻밤 사이에 장악”
하고 그 광대한 지역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다주었으며, 또다시 “넘쳐흐르는 일
본인종의 에너지”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10개월 만에 “징기스칸이나 노루치
(누르하치―인용자)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중국을 점령”하였다는 것이다.16)
그러나 윤치호는 동시에 일본이 이룬 문명화의 맹점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를테면 교육받고 교양 있어 보이는 일본인 신사가 외국인에게는 흠잡을 데 없
는 서양식 신사로서 처신하지만, 외국인만 사라지면 일본 여성을 마치 노예처럼
다루는 것에서도 그 사실이 드러났다.17 )
물론 공정하고 공평한 일본인도 있었다.
윤치호가 독립협회운동의 실패 후 원산 감리로 좌천되어 있을 때 만난 그곳 일본
수비대 대장인 우시오(潮敬二)대위가 그런 일본인이었다. 우시오 대위는 공손하
고 용기 있고 친절하고 동정적이고 생각이 깊은, 신사의 모든 미덕을 다 갖춘 사
람이었는데 그 때문에 다른 일본인들로부터 야마토 정신이 없다고 비난받을 정
도였다. 그러나 그처럼 공평하고 진지한 일본인은 윤치호에게 “드문 현상!”이었
다.18)
전형적 일본인은 오히려 주한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権助)같은 인물인데,
그는 조선 고관이 대접한 저녁식사 자리에서 “조선 양반들은 너무 많이 먹기 때
문에 모든 피가 위로 가고 머리는 텅텅 비게 된다”고 발언하는 위인이었다. 19)
갑신정변 후에 상하이에 도착한 윤치호는 조선에서 그처럼 오만하게 구는
청나라가 서양인들에게 굴욕 당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의 당당함에 감탄하였다.
서양 남녀들이 세상을 횡행하나 능히 대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니 문명의 귀
중함이 부럽고, 우리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원통하고, 우리나라가 떨치지 못
하는 것이 매우 근심스럽고, 일본인들이 능히 변화한 것이 참으로 대견스럽다.20)
청일전쟁 때 윤치호는 일본의 승리를 바랐는데 그것은 청을 너무나 미워했
을 뿐만 아니라 그때가 바로 조선이 청의 손에서 놓여날 기회라고 믿었기 때문이
다. 동시에 그는 일본이 승리하면 더 이상 억제가 불가능할 것임을 우려했는데 실
제로 그러한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1896년이 되면 윤치호의 아버지 윤웅렬은
일본이 “매일 뱀처럼 먹잇감의 몸을 감고 있다. 조선의 정치적 생명은 끝나고 있
다”고 한탄하였다.21)
1904년쯤 되면 윤치호는 일본이 고종과 조정에 개혁을 추진
하도록 압력을 가해 줄 것이라는 기대를 버리고 일본을 미워하게 된다. 소위 일본
의 충고라는 것은 일본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며 황제를 설득하여 개혁을 추진하
는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러일전쟁에서의 일
본의 승리는 윤치호에게 층격이었다.

5월 27~28일에 발틱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었다. 얼마나 영광스러운 전투였나.
조선 사람으로서 일본의 승리를 반길 이유가 없다. 그러나 황인종의 일원으로서
나는 일본의 위대한 승리가 자랑스럽다. 허풍선이 미국인, 거만한 영국인, 허영
심 강한 프랑스인도 이제부터는 황인종은 어떤 위대한 일도 하지 못한다는 말을
감히 할 수 없을 것이다.22)
윤치호는 일본의 승리가 조선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대한 사건임을 알고 있
었다. 그는 “황인종의 일원”으로서 일본을 사랑하고 존경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
람”으로서 모든 것을 앗아가는 일본을 미워하였다. 당시 외무협판이던 윤치호는
일본 사람들이 연 축하 가든파티에 참석하고 돌아와서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슬픈 심경을 토로하였다.23)

3. 일본인의 성정과 일본 식민지배의 특성
윤치호는 한마디로 일본인을 대단히 “편협하고 왜소”하며 힘에만 의지하려 하는
사람들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통치는 영국식이 아니라 독일식이며
불필요하게 강압적이다. 일본인들의 강압적 태도는 사람을 때리면서 “나를 두려
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소리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을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그런 강압적 통치가 인간 본성에 맞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일본
이 덜 독일화되고 더 마음이 넓었다면 얼마나 위대한 국가가 되었을까!”라고 한
탄하였다.24)
윤치호는 또한 일본인들의 야비함과 탐욕을 비판하였다. 그는 러일전쟁의 승
리가 굳어지기도 전에 이미 일본인들이 조선 사람들을 학대하고 약탈하며 그들
의 노예로 만들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는다고 파악하였다. 명목상으로는 매매이
지만 실제로는 조선 사람들의 논과 임야와 집들을 빼앗으면서, 저항하면 때리고
발로 차고 때로는 죽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그러한 야비함과 음모와 약
탈정책이 조선 사람들을 반일로 몰고 가 일본은 결국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
하였다.25)
강제병합 후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윤치호의 비판은 더욱 날카로워
졌다. 그것은 곧 조선 사람 주머닛돈을 걷어서 일본 사람들을 돕는 정책이며 정부
의 대규모 지원 하에 일본인들을 조선에 정착시키고 조선 사람들을 쫓아내려는
것이었다. 강제병합 즈음해서 윤치호는 일본군 장교가 드러내놓고 10년 후면 조
선에는 어떤 조선인들도 남아 있지 않고 시베리아의 구석에 흩어져 있을 것이라
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 장교는 일 년에 조선 사람 100만 명이 죽임을 당하거
나 쫓겨날 것으로 계산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조선 사람이 만주 평야나 시베리아
밀림에서 살 곳을 찾아야 한다면 조선의 잘 닦인 도로와 나무가 울창한 언덕에 고
마워할 일이 무엇인가?”26)
대지주로서 조선의 농업 상황을 잘 알고 있던 윤치호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빨리 조선의 경작지를 모았는지 한탄하였다.
윤치호가 볼 때 소위 시정 개선이라고 할 때 일본 당국이 고려하는 유일한 질
문은 그것이 일본의 이익에 부응하는가였다. 따라서 일본인들이 일차적으로 이
익을 얻지 않는 곳에는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관찰이었다. 주인
공은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이고 물질적 진보의 면에서 조선 사람은 우연히 이익
을 얻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일시동인(一視同仁)이니 “천황폐하의 소중한 자식
들”이니 말을 하면서 막상 일본인들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취하고 조선인들에 대
한 학대는 조금도 제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윤치호는 일시동인에서 “계모의 행
동”을 보았고, 수십만 명의 “작은 독재자들”이 휘젓고 다니면서 조선 사람들을 멸
시하는 짓을 그만둘 때까지 조선 사람들은 일본의 약속을 믿지 못한다고 생각하
였다.27)
박흥식이 화신백화점을 시작할 때 윤치호는 그도 결국 일본인에게 이용
당하고 망할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즉 박흥식이 “교활한 일본 상인들”을 위하여
종로 한복판에 커다란 상점을 짓고 있는데 그것이 “일본 사람들 손에 안전하게
넘어갈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28)
윤치호는 특히 민족차별정책에서 일본인들의 이중성을 간파하였는데 “기부금과 세금만” 제외하고 모든 부문에서 차별이 발견되었다. 일본은 국가 차원에서 서양을 상대할 때와 아시아를 상대할 때 전혀 다르게 행동할 뿐만 아니라, 학교 졸업식에서조차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을 구분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윤치호가 특히 심각하게 생각한 것은 교육과 관직에서의 차별이었다. 그는 총독에게도 기회 있을 때마다 차별 중단을 청원하였으며,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에 동원되어 연설할 때도 그에 대한 비판을 빼놓지 않았다. 일본은 여전히 “계모”일 뿐만 아니라 “자기가 낳지 않은 자식보다
제 자식을 더 많이 둔 계모”처럼 행동한다는 것이었다.29)
윤치호는 일본인들이 자기들의 애국심은 최고의 미덕으로 찬양하면서 종속
된 사람들이 자기들의 잃어버린 나라를 사랑하는 표시만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반
역자로 처벌하는 것에서도 이중성을 보았다. 1920년대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험
악해지면서 일본이 미국에 대하여 “정의인도”(正義仁道)를 주장하자, 윤치호는
먼저 조선에게 정의인도를 보이고 난 다음에 미국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라고 조
롱하였다.
일본에 대한 윤치호의 비판은 대일 협력에 좀더 적극적이 된 1930년
대 말에도 변하지 않았다. 결국 일제의 통치가 조선왕조의 통치보다 나을 것이라
고 기대했던 윤치호는 실망하고 만다. 조선에서의 일본정책은 가진 걸 다 빼앗는
“저주할 만한 이기심”이고 “악마와 같은 국가정책”이다. 결국 윤치호는 “우리의
새로운 지배자들은 예전 조선황제의 부패한 관리들의 지옥 같은 정책과 마찬가
지로 우리를 다스린다”며 절망하였다.30)
그렇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감탄할 만한 큰 장점이 있는데 그것은 상무정신,
즉 전사적 정신이다. 위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윤치호는 힘이 이 세상을 지배하는
동력이라고 믿은 일종의 사회적 다윈주의자였다. 그러나 그가 상정한 힘은 단순
히 물질적 힘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 중요시한 것은 ‘전사적 정신’이었다. 윤치호
는 전쟁에 대한 유럽인들의 사랑이 세계 제패를 가능하게 했으며, 일본도 2천 년
동안 끊임없이 싸움으로써 상무정신을 발달시켜 오늘날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해
석하였다. 윤치호가 볼 때 “천황으로부터 오두막의 가장 가난한 노무자”에 이르
기까지 모든 일본 사람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상이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싸우
는 정신”이다. 일본이 조선과 달리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
소는 상무정신이며 그것을 유지함으로써 일본은 “작은 중국이나 인도”가 되지 않
았다는 것이다.31)
한편 조선의 역사는 과도한 평화주의가 인간 본성에서 모든 영
웅적 요소를 없애 버린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본보기이다. 윤치호가 용서할 수
없었던 조선 왕조의 죄는 500년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전사적 정
신을 뿌리째 뽑아버린 것”이었다. 그 결과 양반들은 전쟁터에서 적을 대하는 대신
붓과 혀를 사용하여 음모로 적을 죽이는 수치스럽고 비열한 당파싸움에 몰두했
다는 것이다.32)
그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 따 전사적 정신을 되찾기를 바
랐고 그것이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 지원병제에 찬성한 하나의 이유였다.
그러나 윤치호는 동시에 전사적 기질의 병폐를 간파하고 있었다. 일본 국민
.
의 미덕은 군인의 미덕인데 그것은 용감하고 주의 깊고 철저하고 민감하고 기율
적인 것을 말한다. 반대로 일본 국민의 결점 역시 군인의 결점으로, 잔인하고 약
삭빠르고 의심 많고 복수심에 불타고 성질이 급하고 무도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부정적으로 볼 때 일본 국민은 “피에 굶주려 있다. 그들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
는 것을 사랑한다.”33)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 통치도 지독히 강압적이다. 윤치호가 볼 때 특히 3・
1운동은 일본 사람들의 잔인함을 재확인해 준 사건이며 일본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정치인 암살도 일본 사람들이 “피에 굶주린 인종”이며 “죽이거나 자살하는 것이 일본 사람들의 정열”임을 입증해 주었다. 윤치호는 “‘죽이거나 죽자’ 혹은 ‘죽이고 죽자’가 야마토 정신의 핵심”이라고 조소하는데, 정당하게 인도된다면 그러한 정신은 일본 사람들을 가장 용감한 전사로 만들 수 있지만 잘못 적용되면 히스테리적 암살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윤치호는 일본 사람들이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적인 국민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웃음밖에 안 나온다”며 조소하였다.34)
그럼에도 윤치호는 조선민족이 일본을 통해서 전사적 기질을 배울 수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4. 태평양전쟁기의 협력

윤치호는 1938년까지는 일본의 손에 휘둘리지 않으려 노력하였고 어느 정도 성
공할 수 있었다. 비록 조선인과 일본인 모두가 그를 사회 원로로 대우했지만 그는
될 수 있으면 나서지 않으려 하였고 공식 직책을 맡는 것도 피하였다. 1934년 총
독부는 윤치호를 중추원 고문으로 영입하려 시도하였다. 그가 중추원에 들어오
면 일본 통치에 대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확실한 지침이
될 것이라는 이유였다. 이에 대하여 윤치호는 “상황에 따라 일본 지배가 어쩔 수
없으면 반대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니 가만히 내버려 달라”며 거절하였다.35)
윤치호가 상하이 임시정부를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한 데서 보듯, 그는 현실
주의자였다. 윤치호는 3・1운동 당시YMCA를 지키기 위하여 건물에 일본 국기
를 게양하라고 지시하였으며 신사참배에 대한 의견에서도 현실타협적인 면을 드
러냈다. 즉 일본정부와 총독부가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동이 아니라 일본 국민의
상징에 대한 존경심의 표현이라고 선언한 이상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
며 굳이 신사참배를 종교적 행동으로 간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신사참배는 단순히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지키는 일이 되며 기독교의
교리와 상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윤치호는 조선 사람들의 신망도 얻고 일본 당
국도 건드리지 않는 식으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면 강압적 통치에 숨막혀하게 되는데, 특히 흥업구락부사건이 그를 절망하게 만들었다. 흥업구락부는 기독교계 기호파인 신흥우가 주동이 되어 흥사단 계통의 수양동우회에 대항한 경쟁적 단체로 만든 것이다. 윤치호는 이 단체의 명목상 회장이었지만 실제 활동은 거의 없었는데 1938년 일제는 갑자기 관계자들을 수감하고 압박하였다. 윤치호는 흥업구락부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석방과 복직 등을 위하여 총
독에게 여러 차례 청원하는 등 조금 더 대일 협력에 다가갔지만 이때조차 중추원
참의로 끌어들이려는 총독부의 시도를 물리쳤다. 그렇지만 1941년에는 그동안
고사했던 중추원 고문직을 수락하고 1945년 초에는 일본 귀족원 칙선의원에 선
출되었다.
그렇다면 윤치호가 적극적 친일로 다가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 일제
의 철저한 억압이 있었다. 윤치호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 일본은 경찰국가가 되
었고 히틀러의 나치나 스탈린의 소련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은 윤치호에게 1910년대의 수형생활을 기억하게 만들었는데 그는 그러한
육체적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인간적 실토를 하였다. 특히 미나미 지로
(南次郞)총독이 내선일체에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을 때 윤치호는 “우리는 일
본제국의 신민이 되든가 아니면 유럽이나 미국이나 천당으로 옮겨 가든가” 결심
해야 한다고 한탄하였다.36)
물론 일본의 성공이 조선 사람들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적극적인 이유도 협력행위의 한 요인이었다. 윤치호는 특히 만주사변 후 일본정책을 지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만주가 조선인 정착민들에게 삶과 일자리를 제공해 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의 애국자로서” 윤치호는 일본이 만주에서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일본이 성공하면 만주에 있는 조선인들만 이득을 얻을 것이 아니었다. 윤치호는 만주라는 엄청난 보고를 확보하게 되면 일본은 경제적 공포로부터 벗어나 조선 사람들에게 조금 더 관대해질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가장 특기할 것은 만주에 정착한 조선 사람들 가운데 미래에 “위대한 인물들이 나타나 영웅적 활동을 벌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윤치호의 기대였다. 그
는 조선에서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기 힘들다고 판단하였다. 지난 수백 년의 종
교, 철학, 정치, 사회조직, 역사적 배경 등이 “조선 인종의 정신을 왜소하게 만드는
데 공모”해 왔기 때문에 그 좁은 경계를 벗어나야 “위대한 정신이 숨쉴 공간과 행
동할 공간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37)

일본제국의 팽창은 조선 사람들에게 물질적 이익을 가져다주는 데서 그치지
않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윤치호는 일본의 훈련 하에서 조선 사람들이 전사적
정신을 배우기를 바랐는데 이러한 성향은 결국 그로 하여금 지원병제를 찬성하
는 데까지 이르게 하였다. 일부 연구자들은 전쟁 시기 윤치호의 대일 협력에 대하
여 내선일체론의 “사기성”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윤치
호는 일본의 사기성을 잘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제국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어떤 민족이나 인종도 전사적이지 않으면 역사에 이
름을 남기지 못했다는 것이 윤치호의 판단이었다. 애석한 것은 어떤 민족도 “실제
로 전쟁을 겪지 않고는” 전사적 정신을 획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38)
중일전쟁 이후의 사태 전개는 그에게 조선 사람들이 직접 전쟁을 경험하여 전사적 정신을 되살릴 수 있는 호기로 보였다. 윤치호는 특히 조선인 지원병제를 지지함으로써 친
일파라는 딱지를 뗄 수 없게 되었는데, 실상 그는 지원병제를 “조선 사람들의 역
사에서 새로운 장의 시작”이라며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조선인 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로 전환)에 대해서는 정말 친일파라고 비난받을 만한 말을 하였다. 즉 조
선 젊은이를 “영광스러운 일본 해군의 자랑스러운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
하여 제국정부에 감사”해야 하며, 조선 병사들이 이 “위대한 명예”에 합당함을 보
여 주기를 바란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39)
그 말은 아마도 진심이었을 것이다. 조선민족이 전사적 정신을 되찾을 때 독립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윤치호가 대일 협력을 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제국주의는 다 마찬가지이고
일본 제국주의가 서양 제국주의보다 더 사악하지 않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그의 태도 변화는 특히 영제국과 관련하여 잘 드러난다. 젊
은 시절 윤치호에게 영국은 인류 문명에서 가장 선두에 선 사회였고 그는 서양 제
국주의에서 탓할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물론 “강함을 믿고 약자를 능멸하는 서
양 정략”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시아 여러 나라가 “잔약하여 그 권리를
보전 못하여” 서양에 종속되었고, 또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포악한 정치로 그 인
민을 잔약하게 하여 “외환을 스스로 청하는 허물”을 면할 수도 없다고 판단한 것
이다. 다시 말해 어떤 민족이 약한 것은 그 민족이 범한 죄이지 다른 민족 탓이 아
니라는 것이다. 즉 “수백만의 신들과 3억의 인구를 가지고도 괜찮은 정부를 조직
하지 못한” 인도나, 청일전쟁 후 독립이 주어졌을 때 어떻게 할지를 몰랐던 조선
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영국과 인도의 관계에서도 돌을 맞을 측은 영국이 아니
라 인도라는 것이 윤치호의 판단이었다.40)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윤치호는 영제국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고 실망하
게 되는데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1920년경 영국의 식민지 통치, 특히 아일랜드
지배에 대하여 보다 자세히 알게 되면서였다. 윤치호는 아일랜드가 투쟁 끝에 자
치를 획득하는 과정을 주의 깊게 지켜보았고, 온건한 자치조차 허용하지 않으려
는 영국에 실망하였다. “영국처럼 상식의 정치력을 가진 나라”가 왜 아일랜드에
서 적어도 50년 전에 주었어야 했을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는지 궁금해 한 윤치호
는 일본이 영-아일랜드의 경험으로부터 교훈을 얻기를 바랐다.41)
그는 또한 인도에서의 영국 제국주의가 기대했던 만큼 관용적이고 인도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가 되면 윤치호는 일제
만이 나쁜 것이 아님을 확신하게 되었다. 일본 제국주의와 영국 제국주의는 마찬
가지이며,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해 모든 유럽 강대국들이 허약한 이웃나라를 공
격했다는 점에서 일본에 먼저 돌을 던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다른
점은 다만 영국 등은 “만족한 강도”인 데 반해 독일 등은 “굶주린 강도”라는 것뿐
이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이미 만족한 강도이고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약탈물을 찾
고 있는 굶주린 강도이다. 그러나 만족해하는 도둑과 같이 살 때 굶주린 도둑과
같이 사는 것보다 더 안전하게 느낀다는 말은 사실이다.42)
윤치호는 특히 1930년대 중국을 둘러싸고 불거진 갈등에서 미국과 영국이
일본을 부당하게 대우한다고 믿었으며, 영국에 대하여 자신이 가진 것을 신흥 제
국주의 국가인 일본에 나누어주지 않으려 하는 “샤일록 같은 나라”라고 비난하였
다. 영국과 프랑스가 “자기들이 가진 것을 다른 도둑들에게 조금 나누어주었더라
면” 더 안전했으리라는 것이다.43)
그는 일본과 서양의 줄다리기 속에서 사태 관전을 즐기는 듯한 모습도 보이
는데, 이를테면 서양이 일본의 “네 개의 S, 즉 작은 체구와 달콤한 미소”(SmallSize
andSweetSmiles)에 속아 넘어갔다며 고소해하였다.44)

그러나 윤치호 자신에게
도 일본민족은 대단히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이었다. 그는 그처럼 꽃을 사랑하고
예술적인 일본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모든
일본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꽃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지만 “전쟁에 대한 열정적
사랑보다 더 설명하기 힘들다.” 그리하여 “우리가 저 사람들을 잘 이해하려면 얼
마나 걸릴까?”라고 한탄하였던 것이다.45)
윤치호는 1930년대에 이르면 부국강병을 의문시하면서 국가가 반드시 거대한 육군과 해군, 식민지와 자족적 물질들을 가져야 행복하고 번영할 필요는 없다고 믿게 되었다. 역사상 위대한 국가의 전사적 기질을 높이 평가했지만 동시에 국가란 칼만 가지고는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이 일본의 정신, 사무라이의 정신”인 한 일본인들은 군사적 흥분과 전쟁터의 모험과 전쟁의 영광을 원하며 그래서 “매 10년 혹은 20년마다 전쟁을 해야 한다.”46)
그리고 그러한 일본 정신에 윤치호는 절망하였다.
그렇지만 윤치호는 1940년 11월,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하자 “낡은 세계에
진정 새로운 날이 밝았다”고 환호하며 태평양전쟁을 “인종들의 전쟁”으로 파악
한다. 윤치호의 희열은 아마도 일본의 승리를 약자도 노력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역사의 예로 판단한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일본이 성공할수록 일본제국에 속한 조
선도 이득을 취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진심은 일본이 이제 만족했으니
더 이상 전쟁을 확대하지 말고 멈추라는 것이었다. 윤치호는 중일전쟁 초기에도
일본의 군사적 승리에 감탄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이 전쟁을 끝내고 중국 문제
를 군사적이 아니라 정치외교적으로 해결할 것을 바랐다.47)
윤치호는 일본이 전쟁을 오래 계속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러 정보를 통해 윤치호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지 2년 반 만에 일본이 보유하고 있던 고무, 철, 석유, 면, 석탄, 금을 다 써 버렸다고 판단하였다. 1940년이 되면 도쿄에 유학 중인 아들도 도쿄
에 물, 석탄, 전기와 다른 일용품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전해 주었고, 다음해 2월부
터 실제로 일본에서 쌀 배급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윤치호의 상황 파악에서 그가
일본의 군사적 승리에 도취한 것은 일시적인 흥분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윤치
호는 일본이 서양 제국들에 적당히 충격을 주고, 그 후 미국이 중재하는 평화조약
을 체결하여 일본이 중국에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조선인
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5. 나가며
윤치호는 선각자였고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열강이 각축하는 시대에 조선
은 도태당할 수도 있는 미약한 나라임을 절감한 그는 조선이 약육강식의 전쟁터
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일생의 목표로 삼았다. 아마도 윤치호가 반
민특위에 불려나갔다면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를 부정하지 않았겠지만 자신이 애
국자임을 열렬히 주장하였을 것이다. 그는 “애국에 여러 길이 있다”는 점을 강조
하였으며, 민족 최선의 이익을 위하여 일하는 데 동의하는 한, 그 방법에 대해서
는 서로 관용해야 한다고 믿었다.
윤치호에게 중요한 실체는 국가가 아니라 인민이었다. 그는 조선 인민이 조
금이라도 대접받고 조금이라도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기 위하여 고민하
였고 그 방법을 정치적 저항운동이 아니라 교육과 계몽에서 찾았으며 대중의 지
적 수준과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일생을 바치고자 하였다. 윤치호는 “조선인들의
전쟁터는 조선”이며 어찌되었든 조선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
고 있었다.
48)
따라서 이상재 등이 그에게 해외에 나가 활동할 것을 권유했지만 번
번이 거절하였다. 그는 외교에 치중하는 파나, 폭력수단에 의지하는 파나 다 소용
없기는 마찬가지라며 해외 민족운동에 비판적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윤치호는
일제 말기에 이르러 대일 협력의 길을 갔다. 윤치호는 조선 사람이 본성적으로는
훌륭한 재목임을 인정하였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훈련인데 윤치호는 일본제국
이 그것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일본은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
도로 문명화를 이루어 낸 민족이며 조선에게 훌륭한 교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조선 인종”에게 최선의 길은 “일본식 성격에 평화와 점잖음에 대한 조선의 사
랑을 섞어서” 훈련받는 것이었다.49)
몇 가지 점에서 윤치호는 당대 다른 조선인 지식인들과 다른 면모를 드러냈
다. 우선 그에게 국가는 중요성에서 개인을 앞서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는 포악
한 정부라도 동족의 정부면 좋다는 전제를 거부하였다. 조선왕조 말기에 윤치호
는 고종의 실정보다는 영국의 지배가 조선 인민에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1930년대에는 만주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의 무정부나 러시아의 잔혹
함보다 일본의 지배가 덜 사악하리라고 판단하였다.50)
윤치호는 국가의 목적을 국민의 안녕과 행복의 유지에서 찾았기 때문에 동족에 의한 가혹한 통치보다는 오히려 이민족에 의한 관대한 지배가 낫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물론 윤치호는 후에 그런 관대한 통치를 하였다고 믿었던 영제국조차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일제의 통치는 더군다나 그렇지 못하였다. 그러나 개인이 국가보
다 우선한다는 윤치호의 신념은 개인이 국가나 민족과 같은 거대 개념에 함몰되
어 있는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되새길 가치가 있는 선견이었다.
윤치호는 당시의 국제정황 하에서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
고 불가항력에 저항하는 대신 어느 정도의 협조를 제공하면서 일본제국의 이기
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판단한 이상 그의 활로는 협력의 범위를 벗
어날 수 없다는 역설에 갇히게 되었다. 마침내 태평양전쟁 후기에 이르러 윤치호
가 일본의 패망을 예견했을 때 그는 이미 오도 가도 못 하는 협력자가 되어 있었
다. 박흥식은 반민특위에 의해 기소된 후 “일본을 이용하려다 오히려 이용을 당
하였다”고 심사를 토로하였다.51)
아마 윤치호의 심경도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비록 윤치호가 일본의 지배를 용인했지만 ‘분리된 조선민족’이라
는 개념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생각해 낸 절실한 해결책은 조선을 ‘일본의 스코틀랜드’로 만드는 것이었다. 스코틀랜드가 영국의 국가체제에 동
화되어 서로에게 좋은 결과를 낳았듯이 조선도 일본제국의 국가체제에 동화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단 조건은 그것이 일본과 조선 모두의 이익
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조선이 “일본의 아일랜드”가 아니라 “일본의 스코틀랜드”
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52)
그러나 일본제국은 영제국이 아니었다. 일본에게 조선은 스코틀랜드가 아니라 아일랜드에 불과했고, 윤치호가 바랐던 조선의 스코틀랜드화는 실현될 기미 없이 오직 그의 일기장에서의 꿈에 그쳐 버렸다.
윤치호는 당시 평균수명보다 긴 80년을 살았다. 그는 죽음으로 친구들과 헤
어지기도 했지만 “종교나 정치적 이견” 때문에 친구들을 잃었는데 그에게 그것은
죽음이 가져오는 이별보다 더욱 슬픈 일이었다.53)
윤치호에게 일본은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동시에 보여 준 반면교사였다. 일본의 전사적 정신은 비유럽세계의 여러 나라들과 달리 일본을 식민지로 전락시키지 않고 강력한 근대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일본을 나락에 떨어뜨렸다. 윤치호에게 일본인들은 칼과 꽃을 동시에 사랑한, 이해하기 힘든 민족이었다. 윤치호는 이 모순적인 일본이라는 실체에 직면하여 그것을 헤쳐 나가려 노력했지만 좌절하고만, 식민지사회의 지식인이었다. (2010년 6월 23일)


ABSTRACT
친일파로 분류되는 윤치호(1865~1945)가 일본에 대하여 가졌던 정서는 흠모와 증오
가 교차하는 복잡한 것이었다. 이 글은 윤치호가 1883년부터 1943년까지 60여 년에
걸쳐 쓴 일기를 토대로 그의 사상을 개략적으로 정리하고, 일본인의 성정과 식민정책
에 대한 평가를 분석한 후, 태평양전쟁기 협력행위의 근거를 추적함으로써 그의 대일
관을 정리해 본다.
윤치호는 한마디로 일본인을 대단히 편협하고 왜소하며 힘에만 의지하려는 사람으로
판단했다. 그렇지만 감탄할 만한 일본인의 장점은 상무정신, 즉 전사적 정신이다. 윤치
호가 볼 때 “천황으로부터 오두막의 가장 가난한 노무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본 사
람을 지배하는 하나의 이상이나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싸우는 정신이다. 반면, 조선왕
조는 500년 동안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사람들의 전사적 정신을 뿌리째 뽑아버림으로
써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본 따 전사적 정신을 되
찾기를 바랐고 그것이 태평양전쟁기에 조선인 지원병제에 찬성한 하나의 이유였다.
윤치호에게 일본은 따라야 할 것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을 동시에 보여 준 반면교사였
다. 일본인들은 칼과 꽃을 동시에 사랑한, 이해하기 힘든 민족이었다. 일본의 전사적
정신은 일본을 식민지로 전락시키지 않고 강력한 근대국가를 이룰 수 있게 해주었지
만 동시에 일본을 나락에 떨어뜨렸다. 윤치호는 이 모순적인 일본이라는 실체에 직면
하여 그것을 헤쳐 나가려 노력했지만 좌절하고 만, 식민지사회의 지식인이었다.

지은이│박지향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서양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뉴욕 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뉴욕 프랫대학과 인하대학을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전공분야는 영국사와 서양 근현대사이며 최근에는 동서양의 제국주의, 민족주의, 저항과 협력의 관계에 학문적 관심을 쏟고 있다.
저서로 『영국사:보수와 개혁의 드라마』, 『윤치호의 협력일기』,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1~2권(편저) 등이 있다. 특집: 한국인의 일본인식 100년 일본비평 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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