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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국의 자본가들
윤치소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한 속내는?
자본주의는 어떤 과정을 통해 한국에 정착될 수 있었을까? 자본주의가 이 땅에 뿌리내릴 수 있게끔 활발하게 자본주의적 경제 활동을 벌인 인물로는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초기 한국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질문들이다. 그러나 초기 한국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여전히 식민지 근대화론과 내재적 발전론을 둘러싼 논란만 부각될 뿐, 정작 탐구해야 할 위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지는 듯하다.
2014년 3월 출간했던 ‘근대 한국의 자본가들―민영휘에서 안희제까지, 부산에서 평양까지’는 그 결과물이다. [일요서울]은 이 책을 통해 자본주의의 정착과정을 재구성해본다. 그 두 번째는 ‘경성직뉴주식회사 사장에서 지주 경영으로 복귀한 윤치소 가문 이야기다.
근현대 한국 역사를 살피다보면 해평 윤씨와 도재공파의 인물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우선 갑신정변에 참가했고 군부대신을 지낸 20세손 윤융렬, 그리고 일제 시기 YMCA총무로 기독교 실력양성운동을 주도했으며 전시기에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귀족원 의원으로 친일 활동을 했던 기독교계 지식인이자 윤웅령의 아들 윤치호를 들 수 있다.
또한 대한제국 시기 법무 학무국장, 일제 시기 중추원 찬의와 참의를 지낸 윤치오,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공사·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비서실장·국회부의장·초대 내무장관 등을 지낸 윤치영도 있다. 22세손으로는 4대 대통령 윤보선, 농림부 장관을 지낸 윤영선을 들 수 있다.
윤치호의 장남 윤일선은 서울대 총장과 원자력원 원장·학술원 회장을 지낸 학계의 저명인사이며 그 후손들은 주로 의학계와 교육계에서 활동했다. 이들이 한말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명문가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데에는 기본적으로 든든한 경제적 뒷받침이 있었다. 한말, 기업투자와 경영
한말 윤치소의 경제활동은 크게 보안 기존의 농업 경영과 대부업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당시 부호들의 일반적 투자 관심사였던 광업권을 매득했고 나아가 금융업과 제조업으로 투자 범주를 확대해나가는 특징을 보인다. 당시 30대의 그는 경제 활동에서 매우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 한예로 농업 경영에서도 향리인 아산에 머물지 않고 1909년 여름 평안북도 연변에 1500정보의 토지를 매입했다.
그런데 여기에 소요되는 20~30만 원의 막대한 자금은 윤씨 일족이 조달했는데, 농업 기술 상의 문제 때문인지 일본인과 동업으로 진행했다. 윤치소의 자본 축적 과정은 대략 1909~1920년의 기업 투자와 경영, 1920년대 이후의 농업 경영과 토지 직접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아산에서 직접 종장을 경영하고 있었던 윤치소는 1908년 무렵 서울로 완전히 이전했다. 곧이어 경성혁신점을 설립·경영하는 한편. 해직 군인들이 전당포 영업을 위해 설립한 조합을 자본금 50만 원의 광업주식회사로 재편했다. 일요서울 이범희 기자 201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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